에르메스(HERMES) ; 프랑스의 역사적인 명품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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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메스 인터내셔널 S.A. 또는 간단히 에르메스는 1837년에 설립된 프랑스의 고급 패션 명품 제조업체다. 가죽, 라이프스타일 액세서리, 가정용 가구, 향수, 보석류, 시계, 기성복 등을 전문으로 취급한다. 그것의 로고는 1950년대부터 말이 딸린 공작마차였다. 나데지 반희 치불스키는 현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다.

 

티에리 에르메스는 독일 크레펠트에서 프랑스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 가족은 1828년에 프랑스로 이주했다. 1837년 에르메스는 처음으로 파리의 그랜드 바우어즈 쿼터에 유럽의 귀족들을 위해 헌신하는 마차 작업장을 설립했다. 그는 마차 거래를 위해 고품질의 연마대와 고리를 만들었고, 1855년 동급 1등상을 포함한 여러 개의 상을 수상했으며, 1867년 파리의 박람회 유니벨스에서 다시 수상했다.

에르메스의 아들인 찰스 에밀은 1880년 아버지로부터 경영권을 넘겨받아 가게를 24루 뒤 파우보르크 생호노레로 옮겼는데, 그 자리는 아직도 남아 있다. 찰스 에밀리는 아들 아돌페와 에밀-모리스의 도움으로 안장사를 소개하고 소매 판매를 시작했다. 그 회사는 유럽, 북아프리카, 러시아,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의 에라이테에게 음식을 제공했다. 1900년에, 그 회사는 타는 사람들이 안장을 가지고 다니도록 특별히 고안된 Haut á Courroies 가방을 제공했다.

 

찰스 에밀 에르메스가 은퇴한 후 아들 아돌페와 에밀-모리스가 리더쉽을 발휘하여 회사 이름을 에르메스 프레르스로 바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밀-모리스는 러시아의 차르에 안장을 얹기 시작했다. 1914년까지 최대 80명의 안장 기술자가 고용되었다. 이후 에밀-모리스에게는 가죽제품과 의류용 지퍼를 사용할 수 있는 독점권이 부여되어 프랑스에서는 처음으로 이 장치를 도입하게 되었다. 1918년 에르메스는 웨일스 왕자인 에드워드를 위해 만들어진 지퍼가 달린 최초의 가죽 골프 재킷을 선보였다. 독점적 권리로 인해 프랑스에서 지퍼가 페메르 에르메스(Hermés Fixer)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가 그 회사의 유일한 우두머리였던 1920년대 내내 에밀-모리스는 액세서리와 옷 컬렉션을 추가했다. 세 사위(로버트 뒤마, 장레네 게랑, 프란시스 푸에흐)도 사업 파트너로 몸단장을 했다. 1922년, 에밀-모리스의 아내가 마음에 드는 핸드백을 찾을 수 없다고 불평한 후에 최초의 가죽 핸드백이 소개되었다. 에밀-모리스가 직접 핸드백 컬렉션을 만들었다.

1924년 에르메스는 미국에 입지를 굳히고 파리 외곽에 두 개의 상점을 열었다. 1929년 파리에서 최초의 여성 큐트 의류 컬렉션이 시사회되었다. 1930년대에 에르메스는 1935년에 가죽 "사크 아 데페즈"(그레이스 켈리의 이름을 따서 "켈리 가방"으로 개칭), 1937년에 에르메스 카레(제곱 스카프)와 같이 가장 인정받는 독창적인 상품들[5]을 선보였다.

그 스카프들은 프랑스 문화로 통합되었다. 1938년, "샤인 단크레" 팔찌와 승마복과 의상이 클래식 컬렉션에 합류했다. 이쯤 되자 이 회사의 디자이너들은 그림, 책, 오베츠 다트에서 영감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는 뉴욕의 네이만 마커스 백화점에서 상품을 내놓음으로써 에르메스의 미국 시장 진출도 목격했으나, 이후 철수했다. 에르메스 실크 넥타이 출시와 같은 해인 1949년에 최초의 향수 "Eau d'Hermés"가 생산되었다.

 



에르메스는 1930년대 중반부터 스위스의 시계 제조업체 유니버설 제네브를 브랜드의 최초이자 독점적인 시계 디자이너로 고용하여 남자 손목 크로노그래프(18K 금 또는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조), 여자 아트 데코 커프 시계(18K 금, 강철 또는 백금)의 라인을 제작하였다. 두 모델 모두 "Hermés" 또는 "Hermes Universal Genéve"라고 서명된 다이얼을 포함했으며, 시계 이동에는 "Universal Genéve S.A"라고 서명했다. 에르메스/유니버설 파트너십은 195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에밀-모리스는 그의 지도력 중 에르메스 철학을 "레더, 스포츠, 세련된 우아함의 전통"이라고 요약했다."

 

2003년 마르기엘라는 에르메스를 떠났고, 논란의 여지가 많은 장 폴 고티에가 수석 디자이너로 2004-05년 가을/겨울을 위한 그의 첫 기성복 컬렉션을 선보였다.

28년간 이 회사의 수장으로 일한 후, 장 루이 뒤마는 2006년 1월에 은퇴했다. 그의 매력과 유럽 최고의 사치 권위자 중 한 명으로 알려진, 그는 오랜 병 끝에 2010년에 사망했다. 1989년에 입사하여 2005년부터 공동 CEO로 장 루이(Jean-Louis)와 함께 일했던 패트릭 토마스가 그를 대신했다. 토마스는 에르메스가 아닌 가족 중 처음으로 이 회사를 이끌게 되었다.

에르메스는 2015년 2월 매출액 40억 유로를 넘는 9.7%의 매출액 증가를 발표했다.


이러한 증가는 국제적으로 눈에 띈다. 아시아에서는 매출액이 7% 증가한 일본을 제외하고, 미국에서는 10%의 증가율을 보인 유럽에서는 7%의 성장률을 보이며 그룹 매장에서 좋은 실적을 올렸다.

2018년 3월 에르메스는 두바이 몰에서 중동에서 가장 큰 다층 매장을 열었다.

2018년 5월 17일 말레이시아 경찰은 다토의 세리 나집 라작과 연결된 아파트의 일부 에르메스 핸드백으로 추정되는 명품 가방 284개를 압수했다.

2019년에는 포브스 선정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브랜드"에서 33위에 올랐다.

 

명품으로 알려진 에르메스는 2008년까지 가죽, 스카프, 넥타이, 남녀 의류, 향수, 시계, 문구류, 신발, 장갑, 에나멜웨어, 장식 예술, 식기류, 보석류를 포함하는 14개의 제품 부서를 가지고 있었다.

에르메스 판매는 약 30%의 가죽제품, 15%의 옷, 12%의 스카프, 43%의 다른 상품으로 구성되어 있다.[4] 회사는 제품을 허가하지 않고 방대한 재고품의 설계와 제조를 엄격히 통제한다.

그 회사는 전통적인 사업 모델에 매우 애착을 가지고 있으며 대량 생산, 조립 라인, 기계화를 거부한다. 에르메스의 상품은 고급 제조를 상징하는 레 아틀리에 에르메스로 알려진 중간 규모의 워크숍에서 손으로 거의 전부 프랑스에서 만들어진다. 실제로 에르메스는 대부분의 품목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한 사람에 의해 조작된 것이며, 이것은 제품의 품질과 독특함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2012년 에르메스 유통업체들은 제품 반품과 교환에 관한 정책을 바꿨다. 소비자는 구매 후 10일 이내에 원래의 구매의 다른 색상 변종에만 물품을 교환할 수 있다. 다른 구매 후 교환은 허용되지 않으며, 소비자가 영수증을 가지고 있는 것과 관계없이 환불은 절대 제공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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